자줏빛이 머무는 잔
단편 소설
자줏빛이 머무는 잔
저녁 아홉 시가 되어서야, 그녀의 작업실 문이 살포시 열렸다.
한껏 차가워진 밤공기와는 다르게, 안쪽엔 짙은 꽃내음과 은은한 와인 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쪽에 앉아. 오늘은 네 차례야.”
유리잔 두개를 꺼내는 그녀의 손동작은 가볍지만 묘하게 느릿했다.
자줏빛 액체가 투명한 곡선을 따라 천천히 차올랐다.
그 속에서 빛이 반사되며 잔잔한 물결을 만들었다.
“색을 읽으면 절반은 이미 맛본 거야.”
그녀는 잔을 들어 빛 쪽으로 기울였다.
남자는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왜, 처음 보는 것처럼 굴어?”
“그, 그게… 빛이 반사돼서….”
“와인은 눈으로도 배우는 거야”
“고개 들고. 제대로 봐. 수업 중엔 시선 돌리지 마.”
그의 변명은 잔 속 물결처럼 금세 희미해졌다.
남자는 어색하게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여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이제 살짝 흔들어. 너무 격하면 향이 달아나.”
그녀의 손목은 우아하고 느긋하게 원을 그렸다. 남자도 흉내를 냈지만 손끝이 버릇처럼 툭 튀었다.
“천천히.”
그녀가 그의 손등을 덮어 속도를 낮췄다.
잔 위로 번지는 향이 둘 사이 숨결을 잇는 다리처럼 엷게 놓였다.
“가까이 와 봐.”
남자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잔을 그의 코앞까지 가져갔다.
“숨을 짧게 끊어 들이켜. 향이 어디 숨었는지 느껴 봐.”
허브와 베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단내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무심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찾았네.”
그녀가 살짝 웃었다.
“이제 테이스팅.”
남자가 잔을 기울이는 찰나,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처음엔 한 모금이면 충분해.”
손끝을 떨며 잔을 기울여, 붉은 물결 한 줄을 겨우 혀끝에 적셨다.
신맛이 먼저 스치고, 달큰한 것이 천천히 퍼졌다.
“생각보다… 진하네요.”
그녀의 눈길이 잔보다 그에게 오래 머물렀다.
한참 뒤, 창밖 소리마저 가라앉자 그녀가 마지막 한 모금을 잔에 남긴 채 잔을 돌렸다.
자줏빛 자국이 유리벽을 따라 가느다랗게 흘러내렸다.
“이 술은 마무리보다 잔향이 길어.”
그는 조용히 잔을 내려다봤다.
“한 번 열린 술병의 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맛이 나. 기억해 둬.”
그는 대답 대신, 혀끝에 남은 자줏빛 잔향을 음미했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때, 그녀가 빈 잔을 내려놓고는 손을 뻗어 그의 잔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가 입을 댔던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아직 온기가 남은 유리 위로, 그녀의 숨결이 하얗게 맴돌다 사라졌다.
“음…”
그녀가 눈을 감으며 짧은 소리를 냈다. 무슨 맛을 본 사람처럼.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
“이쪽이, 훨씬.”
그 한마디 뒤로 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테이블 위 와인잔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바로 세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