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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진격의 거인

'진격의 거인' 보고 떠오른 자유의지랑 결정론에 대한 생각들.

[후기] 진격의 거인

서론

나는 세상의 모든 결과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 생각은 예전부터 종종 하곤 했지만, 진격의 거인을 보고 나서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어떤 변화를 시도할수록 더 깊은 흐름에 휘말리는 모습은
내가 오래전부터 품어 왔던 결정론적 세계관을 더욱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에렌이 갈망하던 ‘자유’란 과연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후기

1. 미래를 안다는 건 좋은 걸까?

에렌히스토리아와 접촉하면서 미래를 보게 되고, 그날 이후 삶의 경로가 달라진다.

마치 오이디푸스신탁을 피하려 하다 결국 신탁을 실현하고 만 것처럼,
에렌 역시 자신이 본 미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미래를 바꾸려 노력할수록, 그가 본 미래대로 행동하게 될 뿐이다.

결과적으로 미래를 ‘안다’는 사실 자체가 그 미래를 실현하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자유를 원했던 인물이, 역설적으로 미래구속된 셈이다.


2. 확정된 미래, 커피우유신화

마사토끼커피우유신화에는 미래를 짧게나마 감지하는 능력을 지닌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능력은 역설적으로 미래를 ‘확정’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미래를 본 시점부터, 그 미래 속 자기 자신도 같은 능력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반복되면서
결국 한 가지 결과로 수렴되는 구조를 갖는다.

이는 미로정답을 미리 알아버린 상황과 유사하다.
다른 경로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에렌이 본 미래 역시 그런 성격에 가깝다.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굳어진 결론을 확인한 것처럼 보인다.
(혹은 결론을 봤기에 그 미래가 굳어졌을 수도 있다)

그 순간부터 다른 선택지가 배제되고,
정해진 시간선만이 남는다.


3. 자유는 없는가 (자유의지는 착각인가)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세계라면, 조사병단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이유는 무엇일까?

엘빈지휘 아래 병사들이 짐승 거인을 향해 돌진하던 명장면은, 외형상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면, 그 선택 또한 구성된 서사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히 설정값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봐야만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에렌은 본인이 본 미래를 바꾸려 애썼고,
다른 인물들 또한 자신만의 이유선택하고 행동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자유의지를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과정에서 스스로 인식하고 판단하며 행동결정하는 일련의 과정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는 “결과를 뒤집는 ”이 아니라,
정해진 세계 안에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태도”에 가깝다.

정의에 따르면, 설령 결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선택과정에서 개인주체성존엄은 지켜진다.

조사병단희생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들은 나름의 가치를 기준 삼아 결정을 내렸고,
바로 그 지점자유의지의 흔적이 남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

진격의 거인자유의지결정론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모든 것이 정해진 흐름이라면,
인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그 과정을 따르는 존재에 불과할 수 있다.
반대로, 정해진 틀 안에서도 상황에 대한 해석행동을 통해
일정 수준의 능동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작품결론을 명확히 제시하기보다는
질문 자체를 독자에게 되묻는 역할을 한다.

물론 내가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관련 분야를 깊이 공부한 적도 없기에 조심스럽지만,

나는 이렇게 답해본다.
자유의지결과를 바꾸는 이라기보다는,
결정된 흐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 그 자체일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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